3일 차(2015년 10월 13일)
노룡두-구문구장성-천하제일관
노룡두
라오룽터우(老龙头)는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岛]에 위치한 장성(长城)이다.
라오룽터우(老龙头)는 전체적으로 돌을 쌓아 축조한 성으로,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 즉, 산하이관[山海关]이 바다로 유입되는 부분에 위치한다.
만리장성은 커다란 용의 형상인데, 바다와 만날 때 위로 솟아올랐다고 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북쪽의 자오산장성[角山长城], 동쪽의 웨이 위 앤 성[威远城]과 함께 기다란 갑(岬)의 형태를 취하면서 산하이관성을 수호하고 있다. 라오룽터우는 보하이[渤海] 속으로 약 20m 정도 뻗어 있으며, 루하이스청[入海石城], 진루타이 [镇虏台], 난하이커우[南海口], 덩하이러우 [澄海楼], 닝하이청[宁海城] 등으로 이루어진다.
어제저녁 숙소 때문에 고생하고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온 식구가 한꺼번에 다 탈 수 있는 3륜 차를 한대 잡아 노룡두 가기를 예약하고 출발했다. 기사 아저씨가 도중 입장료를 내지 않고 구경하고 사진 찍을 수 있는 장소을 이야기하면서 그리로 가자고 꼬드긴다 그 꼬임에 빠져 도로변 바닷가에서 멀리서 노룡두를 쳐다보고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기사 아저씨 요금을 제시하며 우리 일정대로 움직여준다고 또 꼬드기기 시작했다. 산하이관에서 일정은 호텔에 짐을 맡겼기 때문에 구문구장성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각산산성까지 구경하고 체크아웃시간에 맞춰 호텔로 돌아와야 한 일정이었다. 요금 가지고 실랑이를 하다 타협이 되어 3륜 차로 온 식구가 움직일 수 있어 좋았다. 각산장성은 돌아오는 길에 구경하기로 하고 구문구장성으로 출발했다.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산을 넘어가는 길에 가수원이 있어 로상에서 사과를 한무데기 사가지고 이틀 동안 사과를 원 없이 먹으면서 여행을 했다.
구문구장성
중국에서 유일한 수상장성(水上長城)이다. 친황다오에서 매우 가깝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요녕성(遼寧省) 수중현(綏中縣)에 속해있다. 산하이관(山海關)에서 15km 떨어져 있으며, 전체 길이는 1.7km이다. 산하이관 쪽의 장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구강하(九江河) 위를 지나는 석교에 아홉 개의 아치문이 있어서 구문구장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교각의 기반은 강의 물살을 견딜 수 있도록 육면체로 다듬은 석재가 사용되었다. 커다란 석재들은 다리는 물론, 다리를 받치고 있는 강의 바닥에도 사용되었다. 서로 다른 크기로 잘라진 석재들은 서로 단단하게 조립되었고, 그 가지런한 모습이 한 덩어리의 바위와 같다고 하여 “일편석(一片石)”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교각에는 물살에 떠내려 오는 쓰레기나 얼음과의 충돌로부터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참용검(斬龍劍)이라는 보호 시설을 만든다. 이것은 물이 흘러오는 방향으로 설치하는 삼각형 모양의 석재인데, 구문구에는 특이하게도 상류와 하류 방향 모두에 참용검이 만들어져 있다.
구문구장성은 북경과 선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명 홍무 14년(1381년) 이곳의 지리적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32개의 관성이 포함된 장성을 쌓았다. “경동수관(京東首關)”으로 불릴 만큼 요충지였던 이곳에서는 역사를 바꾼 여러 전투가 벌어졌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농민수장 이자성(李自成)과 오삼계(吳三桂)가 불러들인 청나라 병사들이 이곳에서 일편석전투(一片石之戰)를 벌였고, 북양군벌(北洋軍閥)이 통치하던 1920년대에는 직계군벌(直系軍閥)과 봉계군벌(奉系軍閥)이 여기서 결전을 벌였다. 해방전쟁시기(1945 ~ 1950년)에는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도 이곳에서 싸웠을 만큼 과거에는 매우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2002년 11월 만리장성의 일부로 인정되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명 홍무 14년(1381년) 서달 장군의 명령으로 구문구장성이 완공되었다. 장성이 완성된 후 서달과 설계자들은 장성 안쪽에 훈련장과 성관(城關)을 지었으며, 비밀리에 관성 밖으로 연결되는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이 통로는 장성의 지하를 파내어 만들었으며, 길이는 1,027m에 달한다.
통로에는 두 곳의 출구가 있으며, 한쪽은 장대(將臺)와 연결되고, 다른 한쪽은 일편석전장(一片石戰場)으로 연결된다. 터널에는 터널과 연결된 29곳의 작은 동굴이 만들어졌는데, 호종실(號鍾室), 화장실, 금폐실(禁閉室 : 감금실), 중군실(中軍室), 수뢰(水牢), 병기실, 연공방(練功房)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터널은 놀랍게도 배수시설과 2,000명의 병사가 사용할 수 있는 우물, 그리고 통풍구 등도 갖춰져 있었다. 병사들이 장기전을 치를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1644년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의 농민군은 산하이관을 공격하기 전, 먼저 구문구를 공격했다. 구문구를 지키던 오삼계는 산하이관으로 진군해 오던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고, 오삼계는 이 터널을 이용하여 관성의 안과 밖을 오가며 이자성 군을 협공하였다. 구문구장성에서 일편석전투로 지친 이자성의 농민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명군과 청군의 연합세력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세가 불리해지는 것을 확인한 이자성은 급히 말을 몰아 북경으로 도망쳤으며, 오삼계에게 보복하기 위해 오양과 그의 가족 37명을 몰살하였다. 다음 날 스스로 황제라 칭한 이자성은 서안(西安)으로 도망치듯 퇴각하였다.
이자성을 추격하여 북경을 탈환한 오삼계는 진원원을 되찾았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온갖 권세와 재산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청나라에 반기를 든 그는 청나라를 뒤집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고 만다.
천하제일관
행정적으로는 친황다오시[秦皇島市]에 속하며, 둥베이[東北:만주] 방면과의 연안 육상교통로의 관문이다. 위관[楡關]이라고도 하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지이다.
북서쪽으로는 러산산맥 [燕山山脈], 동쪽으로는 보하이만[渤海灣]에 접해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4km 되는 곳이 난하이커우관[南海口關:老龍頭]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북제(北齊) 때 이루어진 것이다.
산하이관성 동쪽에는 만리장성 동문성루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써진 현판이 걸려 있다. 만리장성 동쪽 끝 시작지점으로 예로부터 자주 싸움터가 되어왔다.
특히 명나라 말(末)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위협을 받게 되자 산하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삼계는 다시 산하이관으로 들어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북경을 함락한 이자성이 오삼계의 아버지와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잡아가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협조하게 된다. 오삼계는 이자성을 물리치기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고 철옹성인 산하이관을 문을 청군에게 열어주었다. 북경을 정복한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이후 오삼계의 군대도 청나라 군대에 괴멸되었다.
산하이관이란 지명은 14세기 초 명대(明代)에 성을 쌓고 산해 위(山海衛)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킨 데서 유래되었으며,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관[關]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수(隋)·당대(唐代)에는 임유관(臨制 關), 요(遼)·금대(金代)에는 천민현(遷民縣)·천민진(遷民鎭) 등으로 불렸다. 수(隋) 나라 때 임유관(臨制 關)이라 일컬었지만 현재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고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1세기 초 요(療) 나라 때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화베이[華北]와 화둥[華東]의 중요한 군사요지였다.
현재 징산[京山]·선산[瀋山] 두 철도의 접속지로서 교통상 요지였으며, 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량공장(橋梁工場)이 있어, 황허철교[黃河鐵橋]·한수이대교[漢水大橋] 등 중국의 유명한 철교를 제작하였다. 부근에 만리장성 전설에 관한 유적들이 많다.
산하이관 구경을 마치고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숭덕으로 가기 위해 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진황도로 갔다. 25번 종점에서 내려 버스터미널을 찾아 걸었다. 진황도역 맞은편에 버스터미널이 있었는데 주변은 도로공사 중으로 어수선하고 터미널로 가기 위해 공사판을 도로를 횡단해 터미널에 도착해 숭덕행 버스표를 예매하고 시간이 남아 버스 안에서 먹을 저녁간식을 준비하기 위해 주변 시장골목을 찾아가 고량주 빵 과자등을 사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17시에 출발해 20:40분에 도착했다
숭덕에 20:40분에 도착해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탔는데 밤이라서 숙소 찾기가 여간 고역이었다. 겨우겨우 주소를 찾아 주변아파트를 뒤지다시피 해서 집주인에게 연락이 다아 숙소를 무사히 찾아 잠을 잘 수 있었다. 숙소는 게스트하우스라고 해서 예약했는데 허름한 아파트를 빌려주는 형태였다. 조금은 불편했지만 그래도 하루쯤 묵는 데는 별어려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