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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앞두고 직장동호회 소회

왜 그럴까? 2025. 1. 30. 13:39

2018년 06월 16일

퇴직을 앞두고 직장동호회 소

 

직장 MTB동호회 13년의 소회

 

0. 두 바퀴 자전거

중학시절 3km를 걸어서 통학을 했다. 많은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통학할 때 비포장도로를 걸어 다녔다.

자전거 타고 통학하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친한 친구들이 짐받이나 프레임에 걸터앉혀 태워주곤 했던 기억이 아스라이 난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자전거를 사달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자전거에 대해 한이 맺혀있었을까?

1996년경부터 자전거 통근을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시작해 자전거 타기를 시작할 무렵 유행의 바람을 타고 폭발적으로 자전기타기 열풍이 휘몰아쳤다.

 

0.2006년 석모도 일주라이딩.

MTB동호회 발족을 위해 자전거를 좋아하는 몇몇 동료들과 강화도 석모도 일주라이딩을 나섰다.

강화도 외포리까지 승용차로 이동 배를 타고 석모도로 이동 라이딩은 시작되었다.

멋진 섬풍경을 이곳저곳 구경하고 멋지게 달리는데 내리막 커브길 모래가 쌓여있는 곳을 통과하는 중 사고가 발생했다.

속도가 너무 높았다고 인지했을 때 제동을 잡는 것은 넘어지겠다는 것이나 만찬가지의 행동이다.

순간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커브길 안전펜스를 들이받고 고랑에 처박혔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호흡을 할 수 없었다.

지나가던 강화보건지소에 근무하시는 의사 선생님의 승용차에 실려 강화의료원으로 구로고대병원으로 동네 정형외과로 이송되어 척추골절로 석 달을 병원에서 보내고 일어났다.

 

0. 포기할 수 없는 자전거 타기.

자동차사고 났다고 자동차 안 타고 버리나요?

사고로 동호회 발족도 늦어졌다.

여기서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 없었다.

아내왈 “자전거 다시 타면 자전거와 같이 17층에서 뛰어내릴 거야 “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타기 시작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삶에 있어서 패배자가 된 것 같아 보란 듯이 재활을 마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산으로 들로 그리고 대관령대회 미시령대회 강촌대회 동두천대회 평창대회에 참가해 신나게 달렸다. 평창 100km 랠리 때에는 탈진직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같이 달리던 선수에게 먹을 것을 달라해 파워젤 한 봉지와 쵸코렛 한 조각 얻어먹고 완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회원전원이 참가해 전원이 완주했던 대관령대회도 잊지 못할 대회입니다. 낙차 하지 않고 완주하려 죽을 둥 살 둥 달렸던 강촌대회 대회 마치고 고갯마루에서 얼어 죽을 번했던 미시령대회 기록은 보잘것없었지만 완주하고 나서 해냈다는 쾌감은 달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0. 대마도라이딩

이상춘선배님 퇴직기념라이딩을 일본 대마도로 떠났다. 설렘을 가득 안고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도착해 2박 3일 자전거 타기는 시작되었다. 제주도 풍경과 비슷한 점이 많은 곳이다. 자연 그대로의 섬 삼나무숲길 수백 년 된 소철나무 은행나무 파도치는 항구 다다미방 민숙집 푸짐한 회 나가사키짬뽕곱빼기 온천 이제는 추억의 저편으로 흘러가버렸다.

 

0. 해안선 따라 대한민국 한 바퀴

4336km를 40일 동안 이어 달리기를 했다.

서울에서 처음출발 강화도를 한 바퀴 돌고 나와 인천을 지나 서해안의 수많은 방조제길을 달렸다. 대천을 지나고 군산 변산반도 목포를 휘돌아 진도 해남 완도 강진 장흥 보성 ㅡㅡㅡ

형국이와 영수 셋이서 목포에서 달리기를 시작해 진도에 들어가 멋지게 달리고 나오는 길 우수영에서 더 이상 못 달리겠다고 버스 타고 가버린 사건, 남해의 멋진 풍경을 구경하며 회원들과 같이 달렸던 일, 회원들과 제주도 2박 3일 일주라이딩, 남해안을 돌아 부산, 경주, 포항을 지나 동해의 파도소리를 지겹도록 들으면서 달렸고 자동차전용도로를 달리다 경찰에게 쫓겨났던 일, 간성에서 문산까지 통일을 기원하며 민통선을 따라 달렸던 추억을 지울 수가 없다. 이영중선배님의 퇴직기념라이딩이었던 태안반도 달리기도 잊히지 않는다.

 

0. 규슈라이딩

짖꿎게도 우리의 여행을 시샘이라도 하듯 첫날부터 비는 억수로 쏟아졌다. 구마모토에서 시작해 아소산 분화구를 목표로 달려갔으나 지진피해로 도로들이 망가져 아소분화구 10여 km를 남겨두고 분퇴 해야 했던 일이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숙소를 찾아 마트에서 산 도시락을 싣고 아소칸델라를 벗어나 비 내리는 칠흑 같은 밤길을 달려 겨우겨우 찾아간 숙소에서 회원들과 벌거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 갔을 때 그 기분,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제치고 창문밖을 보니 이런 신천지가 비에 젖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야생화가 만발한 풍경은 다시 한번 가보고픈 추억이었다. 1300 고지를 수없이 갈지자를 쓰며 5k/h속도로 오르고 신나게 다운하고 체인이 끊기고 하면서 유후인을 찾아달렸다. 유후인을 구경하고 나니 어마어마한 갈지자 업힐구간 그래도 두 바퀴는 굴러간다. 고갯마루에 올라서 멋진 풍경 구경하고 벳부를 향해 신나게 내리 달린다. 비는 그치지 않고 체력은 바닥나고 해서 열차 타고 구마모토로 돌아와 꼭 먹어봐야 한다고 통하지도 않는 말 손짓발짓하며 시킨 초밥 맛나게 배불리 먹고 아쉬움에 한 곳 더 보고 가자고 달려 다자이후 텐만구 구경하고 공항으로 돌아와 잔차포장하느라 호들갑 떨고 비행기에 몸 실으니 여행은 끝나버렸다.

 

0. 강 따라 물 따라 발원지에서 하구둑까지

4대 강 자전거길 달리기 뭔가 남들과 다르게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도 “강 따라 물 따라 발원지에서 하구언까지 하구언에서 발원지까지”거창하게 붙였다. 섬진강을 회원들과 같이 댐까지 달리고 홀로 발원지를 찾아 달렸다. 데미샘이 섬진강의 발원지다. 이곳을 찾아 달리고 다음날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을 찾아갔다. 시간이 많이 지나 금강하구둑까지 달렸다. 섬진강. 금강은 각각 3일씩 걸려 완주했다. 북한강은 강화도 보구곶리에서 평화의 댐까지 여기도 3일이 소요됐다. 남한강줄기는 올라가는 방향으로 충주댐에서 멈춰있다.

영산강 낙동강은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서 멈출 것인지 계속 달릴 수 있을 것인지 맘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두 바퀴

참 신기하다

두 바퀴로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사람을 봤다

정말 신기하다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도는 사람도 봤다

두 바퀴로

울릉도 독도를 자전거 타고 건너겠다고 한강에서 연습하는 사람을 봤다

두 바퀴로

정말 신기하다.

 

동호회 회원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게 라이딩하시고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직장축구동호회 소회

어린 시절 고무신신고 새끼줄로 묶고 공차던시절 중학생이 되어 운동화를 신고 공찼다가 어머니한테 혼났던 시절 집에 TV도 없던 시절에 태국에서 열렸던 킹스컵대회 중계를 보려고 선생님댁 마당에 모여 앉아 TV를 시청했던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세대는 킹스컵. 메르데카배. 박스컵 이게 뭔지도 모를 것이다.

이런 축구대회를 구경하면서 자란 세대다.

시골에서 싸구려 우승트로피를 준비해 놓고 마을대항 축구대회를 개최했던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도 축구를 좋아는 했지만 그다지 잘하지는 못했다.

 

직장동호회

군대에서 군바리 막 축구를 했고 제대 후 복직하고 직장에 복직해 좋아하는 운동이어서 80년대쯤 동호회 초대멤버로 축구회를 만들었다. 초창기 동호회는 삼소에 운동장이 없어 증산동 증산배수펌프장 한강공원 등등을 찾아다니면서 공을 찼다. 운동 좋아하고 등산을 좋아한다고 지부 문화체육부장을 맡은 게 노동조합과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축구붐이 일어나고 노동운동을 하는 분들도 노동자의 교류와 연대의 장을 만들기 위해 각종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축구대회, 지방본부장배대회 등등 각종대회에 참석하면서 좋은 성적도 내고 실력도 많이 좋아졌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특히 기관차사무소간 교류전이 많아지면서 더욱 활기차게 움직였던 것으로 생각난다.

각종대회 참석시마다 베스트일레븐에는 끼지도 못했다. 교번을 맞출 수 없어 인원이 부족할 때만 주전멤버 수비수로 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렇게라도 주전멤버로 운동장에 들어가면 가슴이 왜 그리 콩당거렸는지 모르겠다.

30,40,50,60ㅡㅡㅡ

세월이 흐르면서 같이 공 찼던 동료들이 다 떠나 같다. 그래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마냥 좋던 공차기가 열정으로 바뀌고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등산을 좋아해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공차러가면 같이 어울리곤했는데 힘든 동호회들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소통할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축구회는 그나마 명맥이 이어지고 활동이 활발해져 공차러 가면 같이 어울릴 수 있었다.

땀 흘리고 짜장면 시켜 먹고 시원한 캔맥주 한잔 마시면 서로 이야기하고 소통하기 좋은 모임이라 생각된다.

기관사의 근무특성상 동료들과 어울리기가 매우 힘들다. 동호회모임 활동을 하지 않으면 동료들 얼굴 보기가 힘든 직업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동료들과 만남이 쉽지 않다. 그런 이유 때문에 축구회와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패스해 줘

나이 먹어가면서 운동장에 가면 속상할 때가 많았다. 좋은 위치에 있어도 공을 패스해주지 않았다. 패스 안 해준 이유를 안다. 행동이 굼뜨고 볼을 놓치기 일쑤고 몰고 가다 상대방에게 뺏기기 일쑤고 정확한 패스도 못한 게 다반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싶은 열정은 식지 않았다. 체력 패스 볼트레핑 슈팅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후배동료들과 어울리고 싶기 때문이다.

큰소리 지르며 운동장에서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패스!

패스!

그래도 나에게 패스해 주면 안 되겠니?

나에게 패스해 줘

회원님들!

사랑합니다.

 

 

직장 산악동호회 소회

 

관악산에서 설악 지리 한라산까지

 

나의 등산은 어린 시절 땔감이 없어 동네 주변 산으로 나무하러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다. 직장에 들어와 산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동창회 향우회모임에서 행사가 있을 때 산을 가곤 했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산악동호회로 발전했다. 처음 관악산 삼막사산행을 시작으로 등산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80년대 등산모임이 발족되고 교번근무 여건상 산에 가기 힘들었지만 밤일 끝나고 비번날 열심히도 쏘다녔다. 서울근교의 관악산 북한산 수락산을 다니다 경기도 일원의 산으로 등산구역이 넓어졌다. 운악산 포천청계산 백운산 국망봉 연인산 명지산 화학산 등등 골짜기 골짜기에 추억을 그려나갔다. 나물철이 되면 나물채취에 열을 내며 산속을 돌아다녔고 홀로 산행도 무수히 다녔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이런 것이고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악회 모임도 많이 활성화되었다. 봄가을로 정기산행을 다녔고 월례산행도 생겨났다. 80년대 말쯤 꿈으로만 생각했던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산도 해냈다. 꿈에 그리던 백두산도 회원들과 서파에서 북파로 트레킹 할 수 있는 행운의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산더미만 한 등짐을 지고 1박 2일 설악산, 2박 3일 지리산종주산행을 하기도 했다. 년례행사로 설악 지리산을 종주했고 백두대간구간종주산행도 시작했다.

관악산에서 시작해 백두 설악 지리 한라까지 올랐다.

산이 있어 산을 올랐다.

 

EBC ABC 트레킹

꿈에 그리던 트레킹이 현실이 되었다.

트레킹 관련책을 사서 읽고 많은 준비를 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고소적응 문제였다.

부딪혀 보는 거지 뭐 별일 있겠어 다들 하는데

네팔행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 산군의 흰 설산 위를 날을 때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저기를 내가 간다고 마냥 설레는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트레킹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소적응이었다.

3500m 남체에서 3900m의 에베레스트뷰를 적응훈련차 오르는데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천천히 천천히 오르고 또 올랐다.

어렵사리 적응해 가면서 완주할 수 있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었다.

4500m에서 또한 차례 적응훈련 거의 5000m를 오르는 훈련이다. 이날은 그런대로 자신감이 생겼다.

여기에 트레킹기록을 다 옮길 수가 없네요.

저의 블로그 기록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네팔 E.B.C트레킹 9일 차"

http://m.blog.daum.net/jeon4028/41

 

호도협 옥령설산 황산 장가계

 

중국여행의 시작은 사진반을 따라 황산을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자유여행으로 한차례 더 황산을 그 수많은 계단을 걸어서 오르고 걸어서 내려오는 무모한 산행을 했었다. 장가계도 패키지로 한 번가고 자유여행으로 한번 더 갔다. 윈난성 여행 중 호도협을 걸었고 옥룡설산을 케이블카로 올랐다.

우리의 산높이와 비교할 수 없는 흰 설산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 숙이고 무언의 기댐의 마음이 절로 솟구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사진을 감상하면 가고픈 충동이 일고 주체할 수 없는 산행의 욕구가 용솟음친다.

 

백두대간구간종주

1994년 변형근로철폐투쟁파업으로 검수로 쫓겨가 99년 백두대간구간종주산행을 시작하다 원직으로 돌아왔는데 서기에도 많은 산꾼들이 대간길 걷기를 하고 있었다. 홀로 걷다가 동료들과 같이 산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당일산행 1박 2일 산행 최장 4박 5일 홀로 산행을 한 적도 있었다. 왜 이렇게 미쳐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산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세상의 불만과 스트레스해소를 위해 육체적 고통을 즐기는 학대 수준이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1999년-2000년 두 해에 걸쳐 백두대간구간종주 완주를 하고 산을 좋아하는 후배들과 대간종주팀을 만들어 또다시 대간길을 걷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백두대간 종주 "

http://m.blog.daum.net/jeon4028/107

 

대간길에서 산우를 잃다.

 

쓰고 싶지 않은 글이다.

그래도 동료였고 사랑하는 후배였고 정말로 사랑하는 산우였기에 서기산악회 소회에 한 귀퉁이를 채우고 싶었다

두타청옥산 김충기 추모산행 기록으로 소회를 대신합니다.

http://m.blog.daum.net/jeon4028/247

 

산악회 산우 여러분 덕분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항상 건강히 산행 열심히 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