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원계획은 오늘 쿤위산(곤유산)을 트레킹 하는 일정이었다. 어제 연태역 주변에서 사전 쿤위산 가는 교통편을 찾아봤으나 실패하고 여행일정을 변경해 석도 적산법화원을 구경하기로 했다
쿤위산昆嵛山
-타이산, 라오산과 함께 산둥성 3대 명산으로 국가급 삼림공원. 옌타이시 모평구牟平区에 위치하고 있으며, 근여산, 회갑산으로 불리며 교동반도 동쪽의 최고봉.(昆嵛山又名根余山、姑余山、盔甲山,为胶东半岛东部的最高峰) [十六國春秋]를 저술한 북위 최홍崔鴻이 쿤위산을 해상선산지조(海上仙山之祖)로 칭했다고 함.
- 쿤위산은 총면적이 47㎢로 북한산의 두 배 규모이고 주봉인 태박정은 해발 923m임. 창산봉(677m), 노철산 등 72봉으로 구성되어 있음. 앵두산지로 유명하여 매년 앵두축제가 열리고 있음.
- 쿤위산의 주요 풍경구로는 주봉인 타이보딩경구, 도교의 성지인 옌타둥경구(烟霞洞景区)“옌샤둥 쿤위 산 (昆嵛山] 북서쪽에 있는 동굴로 깊이 7m, 높이 3m의 타원형이다. 금(金) 나라 때 함양도사(咸阳道士)인 왕충 양[王重阳]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으며 추추지[丘处机] 등 7명의 제자와 함께 도교(道教)의 새로운 종파인 전진파(全真派)를 창시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은 도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두산백과)
주룽츠경구九龙池景区, 웩스뎬경구岳姑殿景区, 우란사경구无染寺景区 롱취안웬치엔 경구龙泉温泉景区등이 있음.
- 쿤위산의 최고봉인 타이보딩(923m)은 청계산처럼 웨이하이 원덩시文登市에서 정상까지 차가 오를 수 있고 등산길도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국 등산객들은 대부분 구룡지경구의 창산봉(677m)을 트레킹 대상으로 함.
적산법화원
엔타이 숙소 맞은편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7:20) 석도진에 도착해(9:50) 택시를 기다리는데 빵차 자가용의 호객에 넘어가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적산풍경구 입구에서 내렸다. 입장표(70위엔)를 사고 사전 얻은 정보대로 적산정상에 오르면 법화원이 한눈에 들어온다기에 곧장 오르기 위해 법화원경내에 있는 법화탑을 찾아갔는데 입구에 줄을 쳐놓고 경비아저씨가 지키고 있었는데 제지하지 않고 올라가라는 제스처를 해 법화탑 주변에서 차 한잔 마시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중국 산동성 장보고 적산법화원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북부의 적산 남쪽기슭에 위치해 있는 적산법화원은 서기 823년 신라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거액을 들여 세운 불교 사찰로 이는 적산 인근에 위치한 신라방, 신라촌에 살던 동포들의 단합을 도모하고, 이국땅에서 신앙의 힘으로 의지력을 북돋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법화원은 상당시간 동안 소실된 상태였다가 지난 1988년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묘사된 내용을 바탕으로 중건되었는데 산의 남쪽을 기대앉아있는 대웅보전은 이곳의 중요한 건축물로서 보전 안에는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정교한 석가모니의 소상이 자리하고 있다. 1994년 한중우의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취지하에 장보고 기념탑이 세워졌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더불어 2007년도 장보고 기념관도 개관하여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는 중국정부의 공식승인을 받고 세워진 최초의 기념관으로 장보고의출생, 무령군에서 활약상, 법화원 건립등 적산에서의 활동, 신라국과 장보고의 재평가와 한중교류 현황이라는 주제하에 발굴된 유물 1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통일 신라시대 당나라의 산둥반도와 장쑤 성 등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곳에는 신라인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으며 이곳에 세운 사찰을 신라원이라 하였다, 적산법화원은 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신라인 집단거주지였던 산둥반도 적산촌에 세운 사찰로서 신라원중 가장 유명하였다. 장보고는 재당시절 적산 지방에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당나라 무령군의 소장으로 있을 때 적산법화원을 창건하였다(832년) 이사찰은 수확량이 500석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건립된 것으로 장보고는 이를 통해 향후 무역활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의 연락 기관의 역할을 하였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의 승려들도 이곳을 거쳐가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본천태종의 승려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신라 불교 의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의 승려로서 신라의 승려를 시봉하여 스승으로 섬기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승려 엔닌이 머물다 돌아가 쓴 이 기록 때문에 한때 일본의 절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한중수교 이후 바로 잡았고 적산법화원 경내에 장보고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적산법화원은 많은 재력을 지녔으며 이때 행해진 강경의식에서는 신랑 와 당나라의 불교의식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여름에는 금광명경을 , 겨울 에는 묘법연화경을 강롱 하였는데 그때마다 많응 신라인들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 무종(845) 때 불교탄압으로 파손되었으나 일본 승려 엔닌의 저술 입당구법순례행기의 내용을 근거로 1998년 중건되었다.
1시간 정도면 등산을 하면 정상을 밟을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한 시간 등산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정상에도 지킴이 아저씨가 있었는데 등산로 외 지역으로 출입을 막고 있었다. 법화원의 전경뿐만 아니라 시내와 바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맞은편 적산명신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적산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올랐다가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내려오는 길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공작처럼 생긴 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봄이 되어 짝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모습이다.
산에서 내려와 법화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적산명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중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사 원 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절인 지 유흥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일이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좌판을 펴고 차력을 하는 스님들 꼬치구이를 파는 곳 덕분에 주린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사 원 내에서 장사하고 공연하고 우리네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적산법화원, 적산명신 이곳을 구경하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중국 대한민국 일본 세나라는 이곳을 보고 과연 무엇이라고 할까. 세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이곳과 관계되는 역사를 토론하면 재미나는 광경이 펼쳐질 것 같은 생각이듬은 무엇일까요. 내려오는 길목에서 이 지역 전통가옥인것같은 생각이 드는 돌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풀을 심은 것처럼 보이는 집을 볼 수 있었다. 저곳에서 살았던 먼 옛날의 조상님들만이 법화원의 진실된 역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석도버스터미널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나와 웨이하이행 버스를 탔다.
웨이하이에 도착해 예약된 숙소를 찾느라 뺑뺑이를 몇 차례 돌다가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저녁도 먹고 예약된 숙소도 물어볼 겸 한글간판이 눈에 보여 무작정 들어갔다. 여차여차해서 숙소를 못 찾고 있다고 하니 식사하신 후 택시를 잡아 호텔에 갈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해 안심하고 배불리 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예약된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