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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왜 강진에 유배 갔는가?

왜 그럴까? 2024. 3. 25. 12:40

다산은 천주교인인가?

천주학 입문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으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성호 이익 문하에서 학습하여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권철신과도 연을 맺게 된다. 또한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이를 접하게 되었다. 권철신이 주도하여 1777년과 1779년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여러 날에 걸쳐 서학교리 강습회를 열었는데, 정약용은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학문적 호기심에 서양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했다. 1784년 4월에 큰 형수의 제사에 참여했다가 귀경하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천지창조의 기원, 영혼과 육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벽의 설명은 놀랍고도 오묘하여 즉시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책을 여러 권 탐독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천주교와의 인연은 곧 악연이 되어 훗날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명례방 사건

1784년,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귀국한 이승훈이 서울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를 운영하였는데 정약용도 이 모임은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785년 초에 포졸들에게 이 비밀모임이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명례방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 중인신분인 역관 김범우만 투옥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양반출신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사망하였고 이벽은 그의 부친과 갈등 끝에 식음전폐하다 죽었다. 이승훈은 가문의 압박 속에 배교했으며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출신들이 모두 떠나자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이나마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했다.

반회사건

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서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 등과 은밀히 천주교서적을 연구, 토론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알리자,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천주학 도서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 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이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는데, 충청도 지방의 산골마을에까지 천주교 서적이 보급되어 있었다. 1788년에 8월에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 아울러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서적을 색출, 소각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반회사건이 발생한 직후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다. 정약용은 정약전과 함께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나 정약종은 천주학을 내려놓지 못했다.

신해박해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정약용의 집안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 쪽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조상제사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는 유교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윤지충과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은 참수당했다. 평택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당했다.

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지난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극형을 명한 후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사건을 증폭시켰으며 남인들 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하였다.

한편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윤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집안내에서도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발생직후 배교를 했으나 셋째 형 정약종은 반회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참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을묘박해

1795년 6월, 포도청이 밀입국 후 은밀히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체포하는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관련자들이 체포되어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함구하였고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조용히 지나가는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의 기회를 놓쳤는데, 이는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 한 의혹이 있어 보이니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결국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지방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초치였다. 정약용은 무려 7 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정약용이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

신유박해

정조의 급사
형조참의를 제수받아 재직하던 중에 대사간 신헌조가 형 정약전을 부당하게 탄핵하자 '자명소'를 올리고 1799년 7월 26일에 사직하였다.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1800년 초에 낙향하여 마재에서 지내던 중 6월 28일에 정조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급하게 상경하였다. 국장을 치르는 동안에 독살설 등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며 어수선해지자 정약용은 처자를 마재로 내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물면서 정국을 살폈다. 겨울에 주상의 졸곡(卒哭) 이 지나자 낙향하였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날 벼슬순서에 따라 차례로 열을 지어 곡하는 곡반(哭班) 에만 참석하였다. 그 나머지 시간은 고향집에서 경전을 읽으며 지냈다.

숙청 작업

염려했던 대로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1801년 음력 1월 10일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며 남인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률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전국에 떨어졌다. 정순왕후는 과거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어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기에 정조가 즉위한 후 집안은 몰락했고 오라비 김귀주가 귀양지에서 사망하며 정조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이런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 때 성장한 남인을 몰아내고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하는 것이었다. 선왕 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좋은 명분이 되었다.

노론 벽파의 최우선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젊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이 조상 때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으로 이가환은 노론벽파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었다. 이가환은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구속과 석방
정약용은 가슴 졸이며 지내던 중에 셋째 형 정약종이 서적과 서찰등을 숨기려다 관아에 적발되어 모두 압수당했다는 소식을 1월 29일에 접하였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월 8일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국문장에서 단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 뿐이었기에 이미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 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 벽파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2월 11일에 정약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밖에도 이승훈, 최창현 등 많은 이들이 투옥되었다.

정약용은 1791년 진산사건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버렸다. 1797년 천주교도로 오해받자 《자명소》를 써서 반박했고 1799년에는 《책사방략》을 저술하여 배교를 분명히 한 적이 있다. 또한 '동부승지 사직상소'에서도 배교했음을 분명히 밝힌 적이 있었다. 이번 국문 중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며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하였다. 또한 천주교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구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자 체념하였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선교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며 지난번 진산사건(1791년)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기 때문에 정약용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그러던 중 잡혀온 여러 신자들의 국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가 명백한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한 물증들로 인해 정약용과 정약전은 구속된 지 18일 만에 유배로 감형된 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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