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성여행
이번 여행기간은 2015년 중국의 춘운(春運)-설날대수송, 02.04~03.15 40일-기간과 겹칠 뿐만 아니라 춘절 연휴-공식 휴일은 02.18~02.24일 1주일이나 대부분의 기업들이 03.01까지 휴가를 실시기와 완벽하게 겹침. 추운 기간 예상 유동인구는 35억 명 이상-2013년 34억 , 2014년 32억 명이 이 춘절 연휴 기간 동안 28억 명 이상이 대이동 할 것으로 보도되고 있음. 춘절 연휴기간 동안에는 철도/버스/항공 등 대중교통편은 입석-중국 당국은 심지어 ‘항공 입석권’도 구하기 힘들뿐더러 자가용/오토바이를 이용해 귀성하는 차량들로 도로 정체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됨. 또한 국경절만큼은 아니지만 중국 국내관광객들로 인해 관광지 입장과 숙소 확보도 만만치 않음.
일정:2015년 2월 22일-3월 1일(7박 8일)
인천공항 22일 21:45-엔타이 21:55
22일-엔타이
23일-엔타이-펑라이((봉래각여유구)
24일-엔타이-석도(적산법하원,)-웨이하이(한치로)
25일-웨이하이(유공도)-청도-제남
26일-제남-태산(태산)-제남-청도
27일-청도(시내관광)
28일-청도(라오산)
01일-청도-엔타이(시내관광)
엔타이 공항 3월 1일 18:30-인천공항 21:45
여행도시:엔타이-웨이하이-청도-제남-태산
산둥성
중국 동부 연해(沿海), 황하(黃河) 하류, 징항대운하(京杭大运河) 중·북단에 위치해 있는 성(省)으로 간칭(简称)은 노(鲁)이며 성회는 제남시이다.
화베이 평원 동부에 위치한 산둥(山东)은 아주 오래전 화하문명(华夏文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상(商)의 건립 이전에도 이미 산둥 서부 지역은 상족(商族)의 활동 중심지이자 통치 중심지역의 하나였으며 동부는 동이인(东夷人)의 지역이었다. 기원전 11세기 주 무왕(武王)이 상(商)의 주(纣)를 멸망시킨 다음 무왕은 우선 전공에 공이 있었던 강태공(姜太公)을 제(齐),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을 노(鲁)에 각각 봉하였다.
제(齐)의 도읍은 임치(临淄)로 좌전·희공 4년(左传·僖公四年)에·희공 4년(左传·僖公四年) 따르면 그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 황하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 목릉(穆陵, 지금의 沂水와 临朐) 경계점에 달했고 북쪽으로 무체(无棣, 지금의 허베이( 盐山)에 이르렀다(东至于海, 西至于河, 南至于穆陵, 北至于无棣)’라고 기술되어 있다. 제(齐)는 국력이 강성하였고 상공업과 방직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다.
또한 노(鲁)는 취푸(曲阜, 곡부)에 도읍을 하였으며 농업이 발달하였고 인의(仁义)를 숭상하고 전통과 윤리를 지키는 예의지방(礼仪之邦)이었다. 노(鲁)의 도읍인 취푸(曲阜)에서 공자(孔子)는 유가사상(儒家思想)을 창시하여 중국사회의 가치관에 초석을 마련함으로써 제노문화(齐鲁文化)는 중화문화에 대해 큰 공헌과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맹자(孟子), 장자(庄子), 손자(孙子), 묵자(墨子), 노반(鲁班) 등은 당시 제노(齐鲁) 양국이 중화문명의 여러 방면에서 공헌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춘추시기에 산둥 경내에는 수많은 작은 제후국이 존재하여 좌전(左传)에 따르면 모두 55여 개 국가가 있었다고 하며 이 중 영토 및 영향력이 비교적 큰 제후국으로 래(莱), 거(莒), 등(滕), 滕향(向) 향(向등이 있었으며 이후 제(齐)와 노(鲁) 양국에 흡수되었다. 전국시대(战国时代)로 들어서면서 제(齐)는 7웅(七雄)의 하나로 성장하였고 오늘날의 산둥 지역 대부분이 제(齐), 노(鲁) 양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B.C. 249년 초(楚)가 노(鲁)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B.C. 223년 진(秦)이 초(楚)를 멸망시켰으며 B.C. 221년에는 제(齐)가 마지막으로 진(秦)에 멸망하면서 중국은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제노(齐鲁) 지역은 이때부터 중국의 중요한 영역의 일부가 되었다.
산둥지역은 발달한 농업과 수공업으로 인해 진한(秦汉) 이래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산둥의 식량은 부단히 황하를 거슬러 관중(关中)에 공급되었으며 서한(西汉) 시기 산둥지역에는 1,700여 만 명의 인구와 390여 만 가구가 있어 전국 인구의 1/3에 달하였고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한(汉)은 산둥지역의 북부에 청주(青州)와 남부에 연주(兖州)의 1급 행정구인 2개의 주(州)를 두었으나 이후 동한(东汉), 위(魏), 진(晋), 남북조(南北朝) 시기를 거치면서 전란으로 경제가 파괴되었다.
수(隋) 초기에 산둥지역의 가구 수는 전국의 21%였으며 당대(唐代)에 들어 산둥의 경제는 회복되었다. 당시 주요 지역은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고 개원(开元), 천보(天宝) 연간에는 매년 수백만 석의 곡식이 관중으로 운송되었으나 당(唐) 후기에 들어서 이 지역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북송(北宋) 시기에는 송강(宋江) 등이 양산(梁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금원(金元) 시기에 착취가 심했고 게다가 부단한 외세의 침략을 받아 사회와 경제는 심각한 상태로 바뀌어 원대(元代)에 들어서는 산둥의 인구가 단지 126만, 38만 가구로 격감하여 금대(金代)에 비해 인구가 87%, 가구 수는 75%가 감소하여 서한(西汉) 시기의 1/10에도 1/10 미치지 못하였다.
명(明)은 산둥성(山东省)을 설치하고 이 지역의 개간을 장려하여 홍무 26년(1393)에는 산둥의 경지 면적이 북송시기의 2.4배로 늘어났고 1421년 영락제(永乐帝)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 징항대운하(京杭大运河)가 연결되는 제영(济宁) 및 임청(临清)은 운송의 발전에 따라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청 강희(康熙) 연간에 이르러 산둥의 경지는 대폭 증가하였고 1860년대 옌타이(烟台, 연대)가 산둥의 첫 번째 개방 항구가 되었으며 1895년 청일전쟁 시에는 일본에 웨이하이(威海, 위해)가 점령당하고 북양해군(北洋海军)이 전멸하기도 하였다. 1898년 칭다오(青岛, 청도)와 웨이하이(威海)는 각각 독일과 영국에 조차지가 되었으며 청말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에 따라 동북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주가 개방되고 나아가 민국(民国) 초기 장쭤린 (张作霖)의 이주 장려 조치에 따라 연간 천만 명 이상의 산둥 농민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현재의 동북 인구의 주요 구성 부분이 되었다.
신 중국 성립 초기 산둥성 서부, 허난성 북부, 허베이성 남부에 새로 핑위안성(平原省, 평원성)이 설치되었다가 1952년 폐지되며 각각 산둥성(山东省), 허난성, 장쑤성에 편입되었고 장쑤성의 쉬저우(徐州, 서주)와 롄윈강(连云港, 롄윈강) 롄윈강)은 산둥성의 관할 하에 두었었다. 현재 산둥성(山东省)의 행정구획은 성회 지난시(济南市, 제남시)를 포함하여 17개 지급 시(地级市) 49 개시 시 할구(市辖区), 31개 현급시(县级市)및 60개 현(县)의 모두 140개 현급 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경내는 남북 간 약 420㎞, 동서 간 약 700㎞에 이르며 면적은 15.71만 ㎢로 중국 전체의 1.6%를 차지한다. 2010년 실시된 제6차 전국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총인구는 9,579.3만 명으로 전국 인구의 7.15%를 차지하며 성급 행정구 중 광둥성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북부 연해의 빈저우시(滨州市, 빈주시)로부터 둥잉시(东营市, 동영시), 옌타이시(烟台市, 연대시연대 시), 웨이하이시(威海市위해시), 칭다오시(青岛市, (威海市위해시), 칭다오시(青岛市청도시),청도시르자오시(日照市, 일조시)에 이르는 연해도시에 총인구의 50%가 집중되어 있으며 지난시(济南市, 제남시), 타이안시(泰安市, 태안시), 지닝시(济宁市)등의 중부지역에 20%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2월 22일
엔타이(烟台市, 연대 시)
엔타이공항에 밤 10시쯤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예약된 숙소를 찾아갔다. 버스터미널 가까운 곳에 예약을 해서 숙소를 찾는데 별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춘절 말미라서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교통편이나 숙소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2월 23일
숙소 맞은편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시간반정도 걸려 펑라이에 도착했다. 펑라이 터미널에서 봉래각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10여 분만 걸으면 바닷가에 큰 조형물이 보인다. 조형물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바닷가길을 따라서 좌측으로 가면 옛 성과 자연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역사성을 잘 모르고 관광하기는 힘들다. 보이는 것은 고성과 옛 건축물 들이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도 욕구를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봉래각여유구
산둥펑라이거山東蓬萊閣/펑라이수이청蓬莱水城(140원), 싼 시엔산(三仙山(120원), 빠시엔궈하이(八仙过海80원), 펑라이지디하이양시지에蓬萊极地海洋世界(120원?) 황허루/악양루/황허루/악양루/등왕각과 함께 중국 4대 누각으로 불리는 봉래각/봉래수성을 제외하면 삼선산/팔선과해/극지해양세계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테마파크임.
입장료가 엄청나게 비싸므로 봉래각/봉래수성만을 관광하기로 함.
봉래각
펑라이거는 송나라 인종(仁宗) 때인 1061년 건립된 뒤 명나라 인종(仁宗) 때와 헌종(憲宗) 때 복구되었으며, 만력제(萬曆帝) 때 증축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자연적 침식과 전란 등으로 인하여 청나라 중반에 이르러서는 허물어진 담벼락만 남은 폐허가 되었다. 가경제(嘉慶帝) 때인 1829년 다시 개수되었으나 항일전쟁과 내전으로 또 파손되어 청나라 때의 서예가 철보(鐵保)가 쓴 '펑라이거' 현판 외에는 모두 유실되었다. 신 중국 성립 이후 1984년의 대규모 보수공사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개수되어 옛 풍채를 회복하였다.
펑라이거는 넓게는 누각 외에 미퉈사 [彌陀寺]·용왕궁(龍王宮)·천후궁(天後宮)·삼청전(三淸殿)·여조전(呂祖殿등의 건축물을 포함하는 건축군을 지칭하기도 한다. 누각은 산둥반도[山東半島] 북부, 보하이만[渤海灣] 남쪽 기슭의 단야산 [丹崖山] 꼭대기에 있다. 북쪽으로 넓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바닷가에서 머지않은 곳에 경치가 빼어난 창산열도[長山列島]가 있다. 봄·여름·가을이 되면 신기루(蜃氣樓) 현상이 자주 나타나 구름안개 사이로 누각과 정자, 도시 등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 행인과 마차, 푸른 삼림과 산봉우리, 때로는 전쟁터에서 전마(戰馬)들이 질주하는 광경 등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누각은 2층 헐 산식(歇山式) 지붕의 목조 구조이며, 높이는 13m이다. 16개의 큰 마호가니 기둥이 전체 누각을 받치고 있다. 누각의 위층에는 정교한 회랑을 만들어 멀리 조망할 수 있다. 건립 이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들러 경관을 감상하였다. 송나라의 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신기루는 환상에 지나지 않고, 충신과 효자가 바로 신선이다"라는 주련을 남겼는데, 현재 누각 동쪽의 소공사(蘇公祠) 안에 걸려 있다. 동쪽에는 관란정(觀瀾亭)과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해군을 훈련시키는 수성(水城)이 있고, 서쪽에는 피풍정(避風亭)이 있다. 1982년 펑라이거를 포함한 건축물과 펑라이수성[蓬萊水城]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봉래수성과 봉래각을 구경하고 난 후 발걸음은 해안선의 해벽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한때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았음직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길이 나 있었고 해벽에는 잔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출입을 할 수 없게 문들은 폐쇄되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누구도 이들을 통제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하지만 욕심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해안 물가까지 내려가 해벽을 구경하면서 걷고 잔도를 걷고 동굴을 구경했다, 한때는 이곳을 들어오려면 꽤나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서 구경했을 것 같다.
펑라이수이청
바다와 산을 마주하고 있는 단야산 [丹崖山] 동쪽에 자리한 성으로 수이청[水城]의 전 양 먼 [振杨门) 혹은마다오[马道]를 통해 진입하게 된다. 본래 송대(宋代)에 전투용 선박을 정박하던 다오 위자이[刀鱼寨]였으나 명대(明代)에 수이청[水城]으로 개축하였다. 현재 수문, 방파제, 부두, 등대, 성벽, 디타이[敌台], 포대, 후청허[护城河] 등의 항만건축물과 방어용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봉래각여유구를 구경하고 엔타이로 돌아와 내일일정으로 잡혀있는 쿤위 산(昆嵛山) 교통편을 찾아보기 위해 엔타이역 주변을 배회하면서 찾아봤는데 한계에 부딪혀 포기하고 저녁식사할 곳을 찾는데 음식점이 문을 연 곳을 찾을 수가 없어 눈에 보이는 백화점식당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도 난감한 일 벌어졌다. 음식을 챙겨 계산대에서 계산하려 하는데 전용카드가 없으면 안 된단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가 불쌍했던지 계산대 아가씨가 자기 카드로 계산하고 현금을 받아줘 저녁밥을 무사히 먹을 수 있었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