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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는 어쩌다 보길도 부용동에 갔는가?

왜 그럴까? 2024. 5. 30. 23:05

2024년 5월 30일

고산 윤선도 평전을 읽다.

나는 보길도를 두 번이나 방문했고 녹우당에도 여러 번 방문했었다. 그때마다 윤선도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의문이 많아졌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게 된다는데 도대체 아는 것이라고는 조선시대 사람으로  오우가 어부사시사를 지었다는 게 전부였다. 남도답사일번지 강진 해남 하면 다산 정약용 고산 윤선도라고 하는데 왜 일까라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쳇말로 강진은 다산이 해남은 고산이 먹여 살린다고들 했다.
이번에 고산 윤선도 평전을 읽고 고산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풀렸다.


“1936년 병자호란은 조선의 역사에도 깊은 상은을 남겼지만 고산의 생애에 있어서도 큰 분수령이 되었다. 물론 그 의미는 아주 양가적이다. 그것은 분명 비극의 절정이지만 다른 한편 그의 문학이 한껏 꽃피는 출발 점이기도 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그가 치른 권욕을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겠으나 그로 인해 생의 진경이 펼쳐졌으니 인간사란 이래서 오묘한 것인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 고산은 51 세의 나이로 해남에서 칩거 중이었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산은 즉시 가복과 자제를 모아 뱃길로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자체적으로 무장을 한 셈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1937년 정월 29일에 강화도에 도착했으나 강화도는 이미 함락된 뒤였고 인조가 포의 망을 뚫고 영남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왕을 호의 해야 한다는 이념으로 남아하던 중 인조가 항복하고 서울로 환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산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이 소식을 접 하자. 그는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 길로 뱃머리를 돌렸다. 제주도로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로서는 권력적인 패배와, 강화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앞서보았듯이 고산은 정치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무작정 속세를 버리기로 했으니 당시 그가 정신적 충격 또는 허탈감의 강도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렇게 제주도를 향해 남아 하다가 남해 고도에서 한 절경의 섬과 마주치게 된다. 처음 고산이 잠시 쉬기 위해 도달 한 곳은 항원포라는 포구 그 포구에서 멀리 보이는 산지가 바로 부용동이다. 원래 이름이 없었는데 산 모양이 연꽃을 포개 놓은 듯하다고 하여 고산이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고산은 그 때묻지 않은 비경에 완전히 마음을 뺏기고 만다.
“십리 봉 호는 하늘이 내리신 영토이니
비로소 내 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줄 알겠네.”
그리하여 탐라에서 은둔하려던 꿈을 접고 부용동에 정착하기로 마음먹는다. 이후 그는 부용동의 낙서재 동천석실 세연정 등을 지어놓고 신선 같은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강호미학이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병자호란 참화 속에서 무릉도원을 발견하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