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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자전거 타고 대한민국 한바퀴 포항-경주

왜 그럴까? 2023. 2. 17. 13:01

해안선 따라 대한민국 한 바퀴

9월 5일 포항-경주

포항-경주 구간은 해안선 따라 대한민국 한 바퀴 구간에 해당되지 않는 구간이다.

바쁘게 일어나 오늘도 라면으로 아침을 때웠다. 짐을 정리하고 여관을 나서는데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망설여진다. 일기 예보는 밤에 비가 오고 낯에는 개인다는 예보였는데 비구름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나 보다.

방풍우위를 꺼내 입고 망설임을 떨쳐버리고 비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를 건너 바로 형산강 둑 자전거길로 올라섰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자출 아저씨께 길을 물었다. 어디까지 자전거길이 이어지는지, 다리 세 개를 지나면 자전거길이 끝난다고 가르쳐 주셨다. 형산강을 따라 경주시내까지 이어졌기를 바랐는데 할 수 없이 도로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다리 건너편이 포스코 공장
형산강 자전거 길

 

지금 달리고 있는 도로는 7번 도로다. 7번 도로는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지금은 포항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7번 도로의 하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앞에 보이는 고가를 올라가면 터널이 나오게 되는데 걱정이다. 4차선 도로에 어마어마한 덤프 트레일러 차량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 지도상 원래 계획은 형산강을 따라 경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고가밑으로 강을 따라가는 길이 있는데 굳이 찾아보려 하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고가로 올라섰다. 비 때문이다. 자전거 여행객이 가장 싫어하는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타고 갈까 끌고 갈까 망설이다 안전하게 끌고 가자, 갓길 배수통로 위로 올라서 조심스럽게 200m의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차량의 소음이 어찌나 심한지 귀가 먹먹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터널을 빠져나왔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애마에 올라타 달리려고 하는데 뭔가 허전함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선글라스! 아차 싶었다. 고가를 올라서기 전 비를 피해 버스정류장에서 쉬면서 선글라스를 뒤 패니어 위에 올려놓았었는데 그만 깜박하고 그냥 달려왔던 것이다. 찾아 되돌아가보려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터널 때문이다. 아깝지만 포기하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터널을 빠져나와 더 이상 7번 도로를 달릴 자신이 없어졌다. 유금리 IC에서 7번을 탈출하여 13번 지방도를 타고 경주로 들어가려 방향을 바꿨다. 강동 IC 지하도를 통과하여 한적한 시골 들길 국당리로 들어섰다. 천북을 거쳐 보문단지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다. 아침 출발부터 내리는 비는 이제 그치고 맑은 하늘로 변했다. 들녘에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완연한 가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온천지가 풍요롭고 내 것이 아니어도 부자가 된 느낌의 계절이다.

 

천북면을 지나 보문단지 쪽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7번 도로 경주시내 진입로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경주시내로 들어와 지나가는 분에게 길을 물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문화재가 무엇이며 어디쯤인지를.

경주 국립공원 소금강산지구 여러 문화재를 설명해 주셨다. 도로 좌측으로 청강사 절을 지나면 금학산이 나오는데 여기가 경주국립공원 소금강산지구다.

 

첫 번째 만나는 문화재는 굴불사지 사면불상 보물 제121호다.

사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동쪽에 약사여래좌상 서쪽에 아미타삼존불 남쪽에 삼존입상 북쪽에 보살상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두상이 깨져 달아났고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나간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볼 뿐이다. 문화재 주변에 걸린 플래카드가 볼썽사납다. 꼭 저기에 걸어야 하나 ---

 

석조사면불상이 있는 곳에서 대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률사라는 절이 나온다.

신라 법흥왕 4년 불교를 전파하다 순교한 이차돈을 기리기 위한 절이라고 한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로 꼽힌다고 한다.

경주표암 신라6촌 급량부 양산촌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곳이라고합니다. 쉽게 이야기해 경주이씨 시조의 탄생 설화라고나 할까요.

 

신라 탈해왕릉 신라4대 탈해왕 57년-80년재위
숭신전 석탈해왕 제사 모시는곳
분황사 신라선덕여왕3년 634년 창건 분황사 모전석탑 7-9층으로 추정 1915년 허물어져있던것을 일제가 해체수리
분황사 석정
분황사 약사여래 입상 조선영조50년1774년제작

 

경주 황룡사지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 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람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 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 탑 3 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 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임해전, 안압지

 통일 직후 674년에 안압지를 만들었으며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접대장소였으며  임해전과 안압지에 대한 기록 중『삼국사기』을 살펴보면 궁내에 못을 팠다는 기록이 문무왕 14년(674)과 경덕왕 19년(760)에 두 번 나타나며, 임해전에서 군신에게 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효소왕 6년(697)과 혜공왕 5년(769)에 있다. 또 소성왕 2년(800)에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손되었다고 전하고 안압지라는 현재의 이름은 거의 본래의 모습을 잃은 못가에 무성한 갈대와 부평초 사이를 오리와 기러기들이 날아다니자 조선의 묵객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첨성대 국보제31호 천문관측대 다목적 관측대 불교 수미산을 본떠만든 제단 첨성대는 과연 천문대인가?
대릉원(천마총)
숭덕전 박혁거세왕 제사모시는곳

 

포석정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

아래사진 돌뚜껑이 덮여있는 것이 우물이라고 한다.

울타리 쪽으로 보이는 바위돌이 정자에 오를 때 밟고 오르는 섬돌이라고 하는데 검증되지 않은 사실

 

유상곡수연

경주에는 신라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궁지였던 포석정이 사적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포석정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 전복 모양의 돌홈 곡수거만 현재 남아 있다. 그리고 정자(亭子)에 오르던 섬돌이 하나 있다.

 

저곳에 남산골 계곡물을  유도해 흐르게 하고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오면 시를 한수 읊게 하며 ---

바가지잔에 동동주 따라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도착하면 노래한곡 부르고 술잔을 비우는 풍류 ---

한여름 매미소리 권주가 삼아 시원한 노송그늘아래 막걸리 한잔 들이켜면 왕이 부러울쏘냐.

 

경주 유적지 라이딩 하루가 너무 짧다. 그래도 불국사를 안 가볼 수 없어 시내유적지 관광을 중지하고 경주 불국사로 발길을 돌렸다. 불국사 가는 길을 물었는데 7번 도로는 위험하니 보문단지 쪽으로 돌아가면 안전하게 라이딩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저녁 6시에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어 바쁜 마음에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에서 나와 앞도로에서 우회전 첫 번째 4거리에서 우회전 짧은 업힐구간을 넘어서면 7번 도로와 만난다. 안내해 주신 아저씨말대로 7번 도로는 차량이 너무 많고 갓길이 좁아 도로로 달릴 수 가없어 인도로 달렸다. 불국사역을 지나칠 수 없어 인증숏 한 장 남기고 좌회전 불국사 입구를 향해 달린다. 포석정에서 페달을 열심히 밟아 한 시간정도 걸려 불국사매표소에 도착했다. 입장권을 매표하면서 자전거를 봐달라 부탁하고 경내로 들어서는데 37년 만에 온 불국사 구경이 감회가 새롭다.

불국사 건립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5 <대성효 2세 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백과사전)

 

3일째 포항에서 비를 흠뻑 맞고 경주로 들어와 하루가 너무 짧게 지나가 버렸다.

경주의 문화 유적지를 관광하려면 3일은 족히 걸릴 것 같다. 37년 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 보고 처음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우리 것을 볼 기회가 이렇게 없었나 싶다. 바쁘게 살아온 55년 이제 조금씩이나마 뒤돌아 보면서 살아가는 여유를 가져 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 바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6시 30분에 친구를 천마총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불국사에서 6시경에 출발해 7시가 다되어서 친구를 만났다. 고교 동창인데 이 친구도 얼굴 본 지가 30년이 넘은 것 같다. 친구를 만나 친구들 소식 전하고 가족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친구에게 푸짐한 저녁식사 대접 밭고 선물도 밭고 헤어짐이 아쉬워 악수하는 손을 놓지 못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열차시간을 핑계로 돌아설 수 있었다.

친구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