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충칭 귀주성(적수대폭포 병안고진 사도적수기념관)
2018년 10월 22일
적수 赤水市 (츠수이),적수 习水县 (시수이)
적수-쭌이일정이 변경되어 적수에서 일박 더하기로 했다
8:00시에 하루일정이 시작되었다. 어제 사동구경구에서 왕복 10여 km를 걷고 걷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몹시 피곤한데 빵차가 와서 기다려 바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대폭포 경구입구에서 순두부와 죽순탕 다시마탕 세 가지를 맛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며 아침으로 먹었다. 경구입구 붉은 암벽을 바라보며 관광은 시작되었다.
적수단하 여유구 대폭포
경구입구에서 대폭포까지 전동차를 타지 않고 하천 반대쪽 도보길을 따라 3.5km를 걸어 올랐다. 적수의 특색 있는 지형 붉은 바위와 대나무숲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 여기저기 흘러내리는 크고 작은 폭포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대폭포까지 이어졌다. 황궈수폭포와 경쟁을 하는 폭포란다. 황궈수는 인공적인 것이 가미된 폭포라고 한다. 적수대폭포는 자연 그대 로라고 한다. 유명세로 따지면 황궈수겠지만 두 곳을 본저로서는 적수대폭포가 더 아름다웠다. 황궈수폭포 뒤쪽동굴을 보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폭포에서 전체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올라왔던 길을 따라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풍경은 또 달라 보였다. 대나무 가로수길을 달려 병안고진으로 갔다.
병안고진
병안과 토성고진은 ‘사도적수’(四渡赤水)라는 홍 군의 대장정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대장정 중 적수하를 네 번 건넜다는 전적지라는 측면에서 츠수이의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다.
적수다리를 건너 옛 마을이 남아있었다. 마을 안쪽에 홍군 일부가 주둔했다는 조그마한 홍 군 기념관이 있었다. 빵차기사는 그것을 사도적수 기념관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우리는 투청에 있는 사도적수 기념관을 이야기했고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았었다. 고진을 대강 둘러보고 말린 송이버섯도 사고 적수다리를 건너나 와 점심을 먹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자 늙은 시골촌노가 가지고 와서 기증했다는 깨진 항아리와 동전두 잎
홍 군이 전투 중 실수로 항아리를 깨트렸는데 현장에서 동전두 잎을 주고 갔다는 스토리가 있는 기념물품이다.
누구는 이 실화를 마오의 홍 군과 장개석의 국민당군의 행태를 비교하기도 한다.
어찌 된 일인지 손호철교수의 2003년판 레드로드에 실린 사진보다 이사진의 항아리가 더 많이 깨져있다
관리를 잘못한 것인지 글쎄?
중국인들의 단체관광모습이다
기념관 인근에 홍군복장을 빌려주는 곳이 있다
실제 홍군은 저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 기념관을 구경하는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현재에 있어서 마오의 공산혁명은 저 손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도적수기념관
식사 후 츠수이-시수이 (65km)를 달리는 중 기사가 자꾸 이정표를 보고 츠수이와 시수이를 손가락질하면서 반복한다.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된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오후 5:00시면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문을 닫는다. 3:00시경에 출발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했다. 알 수 없는 사진 영상 그림을 보면서 4도적수를 이해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다. 100만의 국민당군에 쫓겨 3만의 홍군은 마오의 전술로 적수를 네 번이나 건넜다는 장정 장소가 이곳이고 이곳에 장정 관련 유적지가 많이 있고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사도적수 기념관(四渡赤水纪念馆), 여자 홍군기념관(女红军馆), 홍군전지병원기념관(红军战地医院纪念馆) 및 마오쩌둥 옛집(毛泽东旧居, 모택동 옛집), 저우언라이 옛집(周恩来旧居 저우포하이 옛집), 주더 옛집(朱德旧居, 주덕 옛집) 등이 있는데 시간에 쫓겨 사도적수기념관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긴 투청(土城)관광이었다. 투청에서도 하루쯤 머무르며 고진과 유적지를 둘러봤으면 좋았을 텐데 고작 한 시간 기념관을 둘러보고 골목길을 통해 기념관광장으로 돌아 나왔다. 퉁청 시수이 사도적수기념관구경 후 6:00시가 지나 취수이로 돌아왔다. 마오타이에서 오는 길에 투청에서 일박하면서 보내고 적수로 들어갔으면 훨 시간이 절약되었을 텐데 사전 지리공부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적수세계자연유산지”이 지역이 세계자연유산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란 표시가 이곳저곳에 붙어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저녁 먹고 맥주도 한잔 나누면서 여행일정을 점검하고 오늘 여행일기도쓰고 내일 아침 7:05분 차로 중경으로 가야 하기에 일직 잤다.
적수를 네 번 건너다
四渡赤水
중앙 혁명 근거지는 한동안 잘되어 나갔으나 그때까지 공산당의 권력을 장악하던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보구와 오토 브라운 등 '친 소련파'의 노선이 비판당했고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실패한 책임을 물었다. 이후 장 제스는 1백만 군대를 동원하여 중앙 혁명 근거지에 대한 제5차 토벌을 감행했다. 결국 홍 군은 장 제스 군의 토벌을 막아내지 못하고 힘겨운 장정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준의(遵義)에 도착한 홍 군은 볼세비키파의 잘못된 지휘를 청산하고 마오쩌둥을 홍 군의 지도자로 추대했다. 그리하여 중국 혁명은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홍군의 기상도 새로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3만밖에 남지 않은 홍 군은 수십만 적군의 추격과 포위 속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오 쩌둥은 적군이 포위망을 완전히 형성하기 전에 제1방면군을 지휘하여 의빈(宜賓)과 노주(瀘州) 사이, 또는 의빈의 상류에서 장강을 건너 사천에 있는 제4방면군과 합세하여 새로운 혁명 근거지를 세우려고 했다. 1월 하순, 마오 쩌둥이 지휘하는 제1방면군은 적수(赤水) 강변에 있는 토성에서 귀주 군벌의 세 연대를 물리치고 적수를 건너 사천 남부로 들어갔다.
홍 군의 제1방면군이 장강을 건너 북으로 올라와 제4방면군과 합세하려는 의도를 간파한 장 제스는 급히 사천 군벌에게 명하여 우세한 병력으로 귀주에서 사천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게 했다. 그리고 장 제스의 직계 부대인 주혼원, 오기 위의 종대도 호남에서 홍 군을 막으러 달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오 쩌둥은 강을 건너려던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군대를 돌려 운남 찰서 지역으로 진군했다.
그러자 장 제스도 여러 갈래 군대들에 명하여 찰서 지역을 향해 진군하게 했다. 홍 군을 찰서 지역에서 포위 섬멸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영명한 지휘로 홍 군은 그곳을 벗어나 다시 사천 남부로 왔다. 그리하여 태평도와 이랑탄에서 두 번째로 적수를 건넌 홍 군은, 장제스의 군대를 멀리 장강 양안에 떼어놓고 다시 귀주로 들어왔다. 귀주로 다시 들어온 홍군은 동신을 신속히 점령했다. 그러자 귀주 군벌 왕가열은 급히 준의로 달려와 홍군 토벌을 지휘했다. 그는 두 개 사단을 준의와 동신 사이에 배치하여 누산관(婁山關)을 지키려고 했다.
당시 누산관은 왕가열의 한 개 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홍군 제3군단은 한 갈래 군대를 파견해 누산관의 좌측 고지인 점금산(點金山)을 맹공격했다. 제3군단의 홍군 전사들은 용감히 싸워 마침내 누산관의 관문인 점금산을 점령했다. 누산관을 점령한 홍군은 승세를 타 준의성으로 진격하여 왕가열의 나머지 군사들을 제거했으며, 왕가열은 수종 몇 명만을 데리고 황급히 도망쳤다.
준의를 또다시 홍 군에게 빼앗기자 좌불안석이 된 장 제스는 급히 비행기를 타고 중경으로 와서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남수북공(南守北攻), 즉 ‘남쪽에서는 막고 북쪽에서는 공격’하는 전략으로 홍 군을 준의, 압계(鴨溪) 지역에서 소멸하려고 꾀했다. 적의 간계를 간파한 마오 쩌둥은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준의 지역을 일부러 떠나지 않고 배회했다. 더 많은 적들이 포위하러 오게끔 유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일부 병력을 내어 동신, 누산관, 준의 일선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를 함과 동시에 주력을 보내서 국민당 주혼원의 군대와 운동 전(運動戰)을 벌였다.
그러다가 장 제스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갑자기 군대를 돌려 모태(茅台)에서 세 번째로 적수를 건너 사천 남부의 고인(古藺) 지역으로 들어갔다. 장 제스는 홍 군이 또다시 장강을 건너는 줄 알고 급히 병력을 새로 배치하여 홍 군의 도강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장 제스 군이 홍 군의 북상을 막으려고 사천 남부와 귀주 북부에 집결하자 마오 쩌둥이 지휘하는 홍 군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사천 서부로 해서 다시 귀주로 향했다. 홍군은 적의 주력을 멀리 떼어놓고 이랑탄, 태평도 일대의 나루터에서 네 번째로 적수를 건넜다.
3월 말, 계속 남하하던 홍 군은 오강(烏江)을 건너 귀양으로 진군했다. 당시 장 제스는 귀양에서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는데 홍 군의 선두가 귀양 근교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는 대경실색하여 급히 운남 군벌의 군대를 불러 귀양을 보호하게 했다. 이는 마오쩌둥의 “운남의 군대만 불러낼 수 있으면 이번 전투에서는 승리한다”는 작전 계획과 맞아떨어졌다. 마오 쩌둥은 홍 군 주력을 지휘하여 신속히 귀양과 용리(龍里) 사이로 해서 상금(湘黔) 도로를 넘었다.
이렇게 적을 멀리 떨어뜨린 마오 쩌둥은 군사를 지휘하여 운남으로 진군했다. 당시 운남의 적군들은 귀주에 가 있었기 때문에 홍 군은 날개가 돋친 듯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에 1백여 리씩 행군하여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이 ‘사도적수(四渡赤水)’ 전투에서 마오쩌둥의 지휘를 받은 홍 군은 기묘한 운동 전으로 국민당군의 포위에서 벗어났으며, 이는 이후의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좋은 시작이 되었다.-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