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까? 2025. 1. 27. 15:51

전기협이란

오천 기관차승무원의 희망이자   철도노조의 중심대오!

1. 전기협의 태동


전국기관차협의회(약칭 "전기협")는 1989년 '전국 기관차 분회장 협의회'의 발족으로 출발하였다. 처음 전기협은 기관차분회장들의 친목회 성격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1988년 미완으로 끝난 7.26 기관차파업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니 만큼 7.26 파업이 못다 이룬 기관차조합원들의 노동조건개선이라는 열망을 받아 안아 1991년에는 기관차승무원 대부분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대중조직으로 발전했다.

기관차승무원들의 독자적인 조직 결성역사는 멀리는 1961년 결성된 기관차노조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철도노조와 더불어 복수노조로 합법성을 인정받았던 기관차노조는 초기 강력한 준법투쟁을 통해 (현재도 인정되고 있는) 불가항력적 사상사고시 면책권을 쟁취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불과 일년만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후 소멸되었다. 물론 1989년 전기협이 결성될 때는 기관차노조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차원보다도 1988년 7.26 파업 때 당시 철도노조가 보여준 행태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부터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2. 철도노조 민주화투쟁의 시작


전기협의 결성은 어용노조의 본산으로 지탄받아온 철도노조 민주화투쟁의 출발점이었다. 원래 1945년 8.15 해방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철도현장은 전국노동조합평의회(약칭 '전평')가 파괴된 이후 "독립촉성 노동 총 연맹(약칭 대한노총) 산하 운수부연맹으로 출범한 철도노조에 철저히 장악되어 왔다. 당시 대한노총이 미군정의 비호아래 발족하고 이후 독재정권의 지원 속에 성장해 온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철도노조는 50여 년간의 역사를 철저히 권력에 굴종하며 조합원에 군림하는 노동귀족의 길을 걸어왔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대한노총이 한국노총으로 바뀌고 철도노조는 한국노총 1번 조합으로 정권의 시녀를 자임했다. 그 결과 조합원의 참여대신에 3중 간선제로 범할 수 없는 성벽을 쌓은 뒤 투쟁 없는 노무관리부서로 전락하면서 조합원은 사용자보다 철도노조를 더욱 두려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단체교섭은 사실상 노사협의회로 대체되었고 조합원의 권익은 철저히 버림받았다.  

심지어 철도노조는 88년 7.26 기관차가 파업투쟁을 벌일 때 절박한 조합원의 요구는 뒤로하고 불법파업으로 매도하는가하면 경찰 진압병력에게 피 같은 조합비를 지출하는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88년 7월 27일 1,653명의 연행자와 11명의 구속자, 3명의 파면자를 남기고 이제 기관차가 가야 할 길은 단 하나였다. 철도노조를 민주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3. 전기협의 성장


 

출범후 전기협은 투쟁을 통해 성장해 나갔다.

 

 - 1989년  5월 15일 전국기관차 분회장 협의회 창립

        1대 의장: 김대일 청량리기관차 지부장

 - 1989년 6월 기관지 "기적"을 창간

 - 1990년 순직조합원 장례투쟁,

 - 1990년  12월 당시 서선원 전기협 사무처장의 파면음모 저지를 위해'부당징계 철회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준법투쟁에 성공,

 - 1991년   7월 전기협 회원 모집하여 대중조직으로 전환. 집행위원회 구성

 - 1991년  10월 불발로 그친 승진차별 철폐투쟁,

 - 1992년   5월 최경집 2대 의장 취임

 - 1992년 10월  유광배 3대 의장 취임

 - 1993년  7월  서선원 4대 의장 취임

 - 1993년 11월 8개 항 관철을 위한 노동조건 개선투쟁

 - 1994년 6월 6.23 파업투쟁까지...

전기협은 점철되는 투쟁의 역사를 이루었다.

 

4. 6.23 파업투쟁과 전기협의 해체

1994년 수당단가 인상을 계기로 기관차승무원들의 불만이 표출되었다.  전기협지도부는 이 불만을 근로기준법 준수와 8시간 노동제-변형근로제 철폐로 응집시켜 전체 철도노동자의 투쟁으로 이끌고자 했다. 정세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가중하고 있었다. 수차례의 수련회와 설명회를 통해 조합원을 조직하고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지협)에 참관으로 가입하여 실제적인 투쟁을 준비해 갔다.

현장의 뜨거운 열기는 88년의 패배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각 지역별 결의대회를 거쳐 철야농성을 벌이며 27일로 예정된 파업시한까지 최대한 대화를 모색해 나갔다. 하지만 공안정국을 계산하는 정권은 대화가 아닌 진압을 선택했다. 6월 23일 새벽 각 지부의 농성장이 경찰에 침탈되자 6.23 철도파업은 선택의 여지없이 결행되었다. 그러나 전지협의 연대파업까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파업대오는 6월 26일, 투쟁거점이던 기독교 회관에 경찰이 침탈하면서 타격을 받고 급기야 6월 29일 복귀지침까지 이르게 된다. 88년의 한계를 딛고 일부 차량과 운수 등 타 분야 조합원까지 동참했던 가장 빛나는 투쟁이 정권의 광폭한 탄압에 참담히 패퇴하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것은 800명 이상의 징계와 30명의 구속, 비연고지 전출 140여 명 등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이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철도노조의 조합징계까지 뒤를 이었다. 이후 전기협은 핵심역량이 뿌리 뽑힌 상태에서 해고자 후원활동조차 탄압받는 엄혹한 시련기에 빠져들게 된다. 기관차승무원의 희망이었던 전기협은 7월 해산되었다.

 

5. 다시 일어서는 철도현장.


6.23 투쟁 이후 기관차지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침체국면에 빠져들었다. 기관차만 투쟁해 온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타 직종의 활동가들과 함께 모든 역량을 철도노조민주화를 위해 집중하고 패배감에 젖은 조합원을 다시 추스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기관차가 아직 패배의 후유증에서 주춤거리는 사이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한 조합원들의 전진은 기관차가 패퇴한 공간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6.23 투쟁이 뿌린 씨앗은 타 직종의 각성으로 싹이 텄고 이제 민주진영은 철도노조의 근간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95년 선거가 벌어지자 민주진영은 약진했다. 철도노동자는 이제 철도노조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96년 범대위투쟁! 수안보의 온천호텔에서 열린 96년 철도노조대의원대회는 상여금을 받는 달에 조합비를 100% 인상할 것과 본조합과 지방본부에 고급승용차를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전국 기관차 지부장 회의와 서울 객화차, 구로열차, 분당선역 지부등 수도권 민주파 지부를 중심으로 "일방적 조합비 인상 반대와 조합원 찬반투표 쟁취를 위한 범지부 대책위원회(범대위)"를 결성, 조합원 서명운동, 집회와 리본달기투쟁, 조합비원천징수 거부운동 등을 벌였다. 하지만 이 투쟁도 철도노조의 버티기에 막혀 더 이상의 진격은 이루어지지 않고 주요 활동가의 조직징계를 양산한 채 마감되었다.

하지만 범대위투쟁은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광범위한 직종으로 철도노조에 반대하는 대중적 정서를 불러일으켰고, 이때 제기한 3중 간선제 위법소송은 2000년 공투본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값진 선물을 안겼다.

 

 

6. 철도노조 민주화를 향하여..


범대위투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자 철도노조민주화투쟁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98년 서울지방본부 위원장선거에서 범민주연합후보를 내세워 당선시켰다. 향후 연합세력 내부의 변질과 분열로 의미가 퇴색하기는 했지만 이제 실제적 대안세력으로 민주진영이 진출하는 단초를 보여주었다. 뒤이어 98년 부산지방본부 위원장보궐선거에서 기관차와 차량지부가 만든 지부연대회의의 후보가 승리했다. 결국 철도노조의 선거무효판정으로 다시 밀리기는 했지만 들불은 꺼지지 않았다. 99년 서울동차지부의 투쟁도 이어졌다.

철도현장은 구조조정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철도민영화-구조조정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7,307명의 인력감축계획은 진행형이었고 기관차는 일인승무계획이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2000년, 세기가 바뀌자마자 1월 14일 대법원은 범대위투쟁이 제기한 3중 간선제무효소송에서 민주진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관차지부는 지부장회의에서 즉각 "철노정상화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차량과 수도권 운수지부는 "전면적 직선제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1월 26일 양 조직이 통합하여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하고 2000년 상반기 동안 직선제 규약개정을 위해 전국을 달구었다. 공투본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울진 백암온천 대의원대회 저지를 위해 달려갔고 직선제규양개정을 위한 조합원서명운동을 위해 전국각지를 철길마다 누볐다. 부산정비창의 가열찬 투쟁과 60일이 넘는 철노본조 점거농성, 40일 이상 고공철탑농성으로 이어진 공투본투쟁은 비록 다수의 징계해고자와 전출자를 양산했지만 12월 5일 서울역 기관차단독집회를 거쳐 2001년 5월 철도노조 최초의 직선제위원장 선거에서 전기협준비위 김재길의장을 위원장으로 당선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7. 민주철노 강화! 전국 기관차의 단결을 위하여..


지난했던 철도노조 민주화투쟁과 철도노동자의 노동조건개선투쟁에서 전국의 기관차승무원은 지난 반세기동안 지치지 않는 기관차의 엔진처럼 내달려왔다. 최초의 직선위원장 김재길집행부의 탄생! 그리고 철도노조 최초의 2002년 2.25 총파업까지... 기관차승무원들은 두 번의 패배를 딛고 여전히 투쟁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어떤 명분과 이익 이전에 오로지 "기관차는 하나다"는 기치를 들고 민주철노의 중심을 잡아왔던 것이다. 88년 7.26 투쟁부터 씨앗을 내린 전기협의 투쟁은 척박한 철도현장에 마침내 빛나는 꽃을 피운 것이다.

전기협은 94년 투쟁 이후 해산되었다. 그간 준비위 과정을 거쳐 2001년 11월 전국기관차지부장회의는 전기협추진위를 구성하였다. 민주철노는 출범했지만 철도현장의 구조조정 파고는 나날이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 동력차 일인승무 계획도 정원만 덜컥 줄여놓은 채 진행형이다. 휴일보장 없이 인간다운 삶을 파괴하는 장시간운전과 심야사업 등 열악한 노동조건은 여전하다. 이러한 과제의 해결 없이 전기협의 투쟁 역시 진행형이다.

그러나 전기협추진위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철도노조를 진정한 민주노조로 강화하는 것이다. 철도노조의 강화는 각 직종이 스스로의 이해와 요구 위에 단결하고 투쟁하는 기반 위에 통일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조합원 대중의 자발성이 분출되는 위에 철도노조의 강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합원, 비조합원을 망라한 기관차승무원의 단결이 철도노조의 진정한 힘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또 앞으로도 수많은 난관을 뚫고 헤쳐나가야 할 철도노조는 5천 기관차의 축적된 경험 위에 우뚝 서야 한다. 기관차승무원들이 십수 년간 겪은 열정과 실패의 경험은 어느 분야보다 높은 단결의 기운과 냉철한 현실인식으로 승화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기관차가 여전히 철도노조의 튼튼한 진지로서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앞으로 전기협추진위는 그 형식이 어떻게 되었건 내용은 전체 기관차의 통일단결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5천 기 관차승무원의 권익과 3만 철도인의 생존권을 사수하는 강고한 진지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할 것이다.

 

2002. 10.

전기협추진위 

[출처] [철도역사] 전기협이란...|작성자 먼산